교회 생활 <릭 조이너>

by 박원옥 posted Jan 2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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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 15절 말씀 처럼 어떻게 하면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라는 말씀이 실제가  될 수 있을까? 

 

에베소서 4: 16절이 그 비결을  말해준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진정한 교회 생활은 그것이 의도되었던 대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까지 실제적으로 자라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이 지역교회에 사활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왜 대다수의 크리스챤이 약하고 패배하고 심지어 성령의 능력과 열매에 반대되는 상태로 남아 있는지 주요한 이유라고 본다. 

 

많은 이들이 덫에 걸리고 속임을 당하고 사탄의 교리에 빠지게-(어떤이들은 주님께로부터 완전히 떠난다)- 되는 이유인 것이다.

 

교회 생활은 진정한 기독교에서의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필연적이다.

  

나는 지역 교회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하는 크리스챤들의 모든 변명들을 들어왔다.

 

그들의 가족이 그들의 교회라는 주장에서부터 ( 만약 그렇다면 왜 주께서 우리에게 이미 가족이 있는데 교회를 제정하셨을까?)   "나는 주님을 사랑해요. 단지 그의 사람들이 싫을 뿐이에요" (성경은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라고들 말한다.

 

인정하듯이, 교회생활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되도록 지어진 것이다.

 

 교회는 또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축복의 가장 큰 근원이 되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모든 기적, 사랑, 흥분, 격앙들, 좌절,실망,지루함. . . . .

 

또한 지역 교회에 넘쳐나는 시험과 승리들. . . . 이것들이  없이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진리와 이해가 증가될 수도, 어떤 면에서 평화와 자기만족을 느낄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사활적인 교회생활은 이것을 위해 필연적이라고. . . . . .

세상에 단 두 형제만 있었을 때도 그들은 함께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우리의 처음 부모님이 잘못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때 인류에게 들어왔던 이기심 때문이었다. 

 

그 열매를 먹게된 것의 첫번째 결과는 "그들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감추고 숨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세가지 것들-

 

1) 자기중심적이 되기,

2) 우리 자신을 덮거나 스스로의 의를 가지려 하기,

3) 대부분의 사람들이 쓰고 있는 수많은 외관으로 숨는 것을 선택 했다. 

 

타락의 결과로부터 진정한 구속은 자기중심성으로 부터 구속되는 것과, 자신을 덮으려 하지 않고, 우리의 죄를 덮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숨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멈추고, 모든 이에게 개방되고 정직해지려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 4장 16절에서 언급한 구절이 " 사랑 안에서 진실 말하기"로 시작하는 이유이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 라는 이상적인 틀을 가지고 있기에 그러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을때,  포기하고 싶은 지경에 이르

기 까지 실망이 불가피하다.

 

의심의 여지 없이, 교회는 주님이 의도하셨던 바 대로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회적 기구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상주의를,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진정한 비젼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이것을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기꺼이 광야를 통과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의 첫번째 세대 처럼 그 땅의 열매를 결코 맛보지 못한채 광야에서 맴돌다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골로새서 2: 2~3절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우리가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질 때 까지는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달을 수 없다.

 

주님은 그의 몸인 교회에 제시되어진다. 

 

마태복음 23 : 39 절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주의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 이후  그가 보내신 사람들 안에서 주를 볼 때까지 우리는 그분을 볼 수 없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분의 권위 안에서 걸으며 열매를 맺기 원한다면  필수적이다.

 

그가 보낸 사람들 안에서 주님을 보는 것은 보통 주님이 아닌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요구된다. 

 

위대한 사도 바울조차 그의 육신이 갈라디아 인에게 가시가 되었음을 인정한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천사 처럼 받아 들였다.(갈라디아서 4 : 14). 

 

 흠을 찾는 것을 멈추고 그 사람들 속에서 주님을 찾기 시작할 때까지는 다른 사람들 안에서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문제를 간과하거나  고치는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의심의 부정적 관점이 아닌  긍정적 관점으로 부터 온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

 

교회는 우리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곳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함이 아닌  교회에 주님이 거주하기 원하시는 장소와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되기를 구하는데 헌신 해야 한다. 

 

주님은 교회를 위해서 가장 부적절한 리더들 중 몇을 선택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바로 전까지도 누가 가장 크냐라는 것으로 다투고 있었고 주님이 가장 필요로 했을때  거의 모두 흩어졌다.

 

직면해 보면 최초의 사도들은 정말 형편 없었다.

 

어떻게 그들을 신뢰할수 있었을까?  주님이 신뢰하셨던 것은 신뢰를 그들에게 두지 않고 성령님께 두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태초에 성령님은 "형체가 없고 공허" 가운데 운행하셨다.(창세기 1: 2)  어떤 번역은  "혼돈" 위에 운행하셨다고 말한다. 

 

그분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것을 취해서 가장 아름다운 창조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시는 듯 하다. 

 

교회들이 성숙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바로 그런 혼돈스러운 상태인 것 같은 때가 있다. 

 

성령께서 운행하시기 위한 최고의 기회인 것이다 ! 혼란스럽게 퇴화되어지는듯 보인다 할지라도, 모든 문제들을 성령님을 위한 기회로 가져가 그분이 하실 위대한 일을 기대함과 함께 솟아 오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적을 보기를 원하지만 그것이 필요한 상태로 가게 되는 것을 바라는 이는 거의 없다.

 

 주님의 사도들 중 단 한 사람도 위대한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분의 능력이 완전해지게 되었던 것은 약함 안에서 였다. 

 

더욱 성령님을 의존하게 만든 것은 그들의 부족함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복종하기 전에 완전한 권위를 원한다.

 

하지만 어떤 상태인가와 상관 없이  보내신 권위를 거절하면 그분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양을 염소로부터 구별짓는 진정한 시험은 그분의 사람들 중 가장 작은 자 속에서도 주님을 볼 수 있는 능력과 그를 하나님의 사람처럼 대하는 것일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거절하면 주님을 거절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이유가 그것이다.

 

모세는 완벽한 것을 보여 주려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그 사람이었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그분의 메신저(사자)를 거절한다면, 보내신 그분을 거절하는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빠르게 자라기를 진정 원한다면, 교회 생활이 더 어려울수록 더 좋다.

 

각각의 문제들은 사랑과, 인내, 평안 같은 것들 안에서 자라기 위한 기회인 것이다. 

 

사랑하는 자만 사랑한다면,  사랑 안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 안에서 자라가기 위해, 사랑 할만 하지 않는 자들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심지어 우리의 적까지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6: 11~12절 "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여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려 하려는 것이니라 "

 

부름받은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얻기 위해서는 인내와 믿음 둘 다 취해야 할 것이다.

 

시험을 낭비하지 말라. 

 

열매를 맺기 위한 이 필수적 두 가지의 자질 안에서 자라기 위해 단 한 가지 기회도 낭비하지 말라. 

 

교회 생활에서 등을 돌리지 말라.

 

그것은 틀림없이 필요하고, 자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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