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 소식



아래의 글은 이원철 선교사가 케냐 나이로비 지역에서 사역하다가 회교권으로 둘러싸인 모얄레 지역으로 가기 전에 보내온 것입니다.  신변에 늘 위험이 따르는 이 지역에서의 사역을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도록 올려 드립니다.


6. 22일 저녁에 출발해서 7박 8일간의 모얄레 방문기간중에 있었던 이야기들 입니다.

나이로비에서 모얄레로 가는 방법은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나이로비 - 이시올로 - 마사빗 - 모얄레> 길입니다.
이 길의 특징은 도로의 상태가 너무나 안좋아서 (대부분이 자갈길이거나 돌이 많은) 트럭들도 불과 몇 번의 왕복후에는 타이어를 교체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중간도시인 마사빗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고, 국제구호단체들의 활동하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미국선교사님들은 이 길로만 다닙니다.

다른 하나는 <나이로비 - 가리사 - 와지르 - 모얄레> 길입니다.
이 길은 마사빗 길보다는 도로의 상태가 좋습니다. 주로 흙으로 덮여있어서 화물트럭들이 선호하는 길이지만 비가 내리면 통행이 불가능한 도로입니다. 마사빗 길보다  250 km 정도 먼 길입니다. 주로 소말리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 대부분이라서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22일>
저녁에 <나쿠루>를 출발해서 <나이로비>로 갔습니다. <와지르>로 가는 버스는 소말리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이실리>라는 지역에서 출발을 합니다. 그곳에 저녁에 도착해서 차표를 끊고, 그 근처의 여관에서 잠을 잤습니다. 신문에 보니 소말리사람이 많이 사는 이 지역을 케냐경찰이 테러관련 용의자를 색출한다고 그 지역의 가택수색을 했다는 기사가 나와있었지만 별다른 동요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23일>
아침 6시 30분에 나이로비를 출발해서 세 시간후인 9시 30분에 <우카시>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이곳부터 경찰의 호송(escort)이 시작됩니다. 3명의 무장경찰과 함께 <가리사>라는 도시에 11시에 도착해서 약 30분을 쉬고, 비포장 도로로 접어들어 <와지르>로 향하였습니다. 아침에 출발해서 저녁 6시 30분경에 <와지르>에 도착했으니 대략 12시간 정도 걸린것 같습니다. 중간에 점심시간도 없이 그렇게 도착해서 허기가 많이 졌습니다. <와지르>는 물에 소금기가 많아서 비누도 잘 안풀어 집니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외부인을 경계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와지르>에서는 교회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전에 미국선교사님(AIM)이 사역했었는데 쫒겨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4일>
<모얄레>로 가는 소형 짐차가 아침 10시에 출발한다는 말을 듣고서(화물트럭 이외에는 다른 교통수단이 없으므로) 기다리기 시작해서, 오후 3시가 되서야 <와지르>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짐칸에 짐들과 함께 빼곡하게 20명은 들어앉아서, 앞으로 260 km 정도의 길을 비포장 도로를 따라서 갈 생각에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이 정도 고생이야 누구나(함께가는 현지인들도) 하는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곳을 떠났습니다. 점점 날이 어두워짐에도 불구하고 차는 어둠을 뚫고서 계속해서 달립니다. 중간에 작은 마을에 도착해서는 싣고간 짐들을 내려줍니다. 함께 짐칸에 타고 가는 한 사람이 저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합니다. 자기 자리가 너무 불편하니까 저에게 그 자리로 오라고 하고 자신은 제 자리에 오겠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니까 바꾸어 주어야지요. 이 지역(소말리 사람들이 사는)에서 외국인이라는 것이 결코 좋은 대접을 받는데 도움이 안됩니다. 자리를 옮기고서 이제나 저제나 도착하기를 고대하면서, 행여 앉아있는 난간에서 떨어질 까 붙들고 가는 손에서는 쥐가 나기도 했지만, 옛날에 군대에서 기합받던 때를 생각하면서 버티다가 결국은 목적지라고 하는 곳에 밤 11시경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도착한 곳은 <모얄레>가 아니라 차로 두 시간 가량 떨어진 <부테>라는 지역이었습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모얄레까지 못가고 내일 아침에 간다는 이야기와 함께 여기서 자라고 합니다. 아무 시설도 없고, 사람들은 처마밑에서 땅바닥에 누워 잠을 청합니다. 대체 이런일이??? 메고간 배낭을 깔고 앉고서 이렇게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좀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길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동네사람들에게 잠 잘데가 있는지를 물어보는데, 마침 근무를 마치고 경찰서로 돌아가는 경찰이 자기와 같이 경찰서에 가서 자자고 합니다. 방도 아니고, 비록 바닥에 매트리스 하나만 있는 곳이었지만 편하게 하루를 쉬었습니다. 길에서 잤다면 강도의 위험이 있었을텐데 하나님이 경찰서에서 자도록 해 주신 것 같습니다.

그 경찰은 제가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바닥에 자리를 피고 기도를 올립니다. 얼마나 많은 회교도들이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며 하루에 다섯번 씩 온 정성을 다해서 기도를 올리는데, 그들의 신은 자기의 추종자들을 전혀 돌보지 못합니다. 제가 보아온 회교(무슬림)의 일반적인 모습은 무지와 가난이며, 혼란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데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좋으신 분입니다. 구원받은 가치가 없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분입니다. 언제나 변치않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좋으신 神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25일>
아침에 차로 가니 어제밤 처마밑에서 잔 사람들이 다시 짐칸에 타고 있었고, 운전기사와 조수 그리고, 돈이 있는 사람들은 식당에서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차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너무 안되 보여서 그 사람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해 하는지... 잠시 기다리는 사이에 어떤 할아버지가 오시더니 제게 말을 겁니다. 잘은 못 알아 들었지만 몇가지의 분명한 단어들 <동무><평양, 조선, 조선말><김 일성, 붉은 기>을 통해서 그분의 말이 북한에서 배운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1970년에 3년간 북한에 다녀왔다고 합니다. 아마도 군사훈련을 받으러 갔다가 온 것 같습니다. 북한의 군가들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소말리지역에서 만난 북한에 다녀온 할아버지...

소말리 지역에서는 한국사람을 좋아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미국을 증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미국이 마치 이라크처럼 한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정하기도 하고, 자기들이 한국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남한보다는 북한을 더 좋아하지만 같은 시각으로 남한을 바라봅니다.

아침 10시경에 모얄레에 도착을 해서 여관에서 좀 쉬고, 미국선교사님을 만나서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식당에 수류탄을 던져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 이야기, 지뢰가 폭발해서 많은 사상자가 난 것을 이야기 하시는데, 그분들에게서 조금도 동요나 염려의 빛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환경이 자신들에게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믿음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캐나다에서 온 두 형제가 미국선교사님을 올해초부터 돕고 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의사가 되는 과정중에 있고, 다른 사람은 항공정비 기술자인데 모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선교지에서 경험을 쌓고 있다고 합니다. 나이는 20살이미처 못되는나이에 그들은 하나님께 삶을 드렸습니다. 제가 "존경한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앞으로 그 지역에서 함께 하게될 학교사역을 논의하고서, 캐나다에서 온 형제들과 함께 <이디오피아 모얄레>로 점심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여기는 국경을 넘는일도 쉽습니다. 국경을 지키는 경찰이나 공무원들을 미국선교사님이 알기 때문에 그저 손 한번 흔들고 넘어갔다가 식사하고 그냥 넘어 옵니다. 아무 절차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임신한 이디오피아의 임산부를 케냐의 병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매일 아침이면 이디오피아에서 약 100여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케냐로 넘어와 학교에 간다고 합니다. 나라는 달라도 생활은 같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역교육청장을 방문해서 그간의 진행상황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사를 하고나서 9월부터 모얄레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6일>
우체국에 가서 사서함을 개설했습니다. 여기서는 우편물을 배달하지 않게 때문에 우체국에 자기의 사서함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배달하게 하면 우편물이나 소포의 도난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이로비에서 우리 학교들을 담당하는 은행의 책임자의 소개로 세관책임자를 만나서 점심을 같이 했습니다. 국경도시인 모얄레에 많은 외지인 공무원들이 있지만 지역이 워낙 위험해서 모두가 혼자만 와 있고, 가족들은 나이로비나 고향에 있다고 합니다. 그분은 나이로비 공항 세관에 근무할 때 부정에 불복해서 싸우다가 이 지역으로 좌천되었다거 합니다. 혼자와 있는 관계로 범죄가 만연된 국경도시에서 신앙을 지키는 것이 어렵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부분도 선교사로서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후에는 우리가 이사하게 될 집을 미국선교사님과 함께 보러 갔습니다. 다행하게 전기가 공급되고 있었습니다. 제 아내가 우리가 이사할 집에는 전기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할 때, 저는 태양전지를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믿음이 저보다 좋습니다. 물이 없는 지역이라서 집안에 수도배관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는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화장실도 당연히 재래식이고 바깥에 함석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재래식 화장실을 써보아서 별 어려움이 없겠지만 아이들이 좀 걱정입니다.

미국선교사님들도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합니다. 집집마다 함석으로 된 재래식 화장실이 있습니다. 물을 얻기가 어려운 지역이라서 그렇습니다.

<27일>
나이로비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장시간 짐칸에서 겪은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돌아가는 편은 꼭 운전석 옆의 앞자리를 구하리라고 굳게 다짐하고 여관을 나섰습니다. 다행하게 어떤 사람이 다가오더니 앞자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차도 화물이 없으므로 6시간 정도면 <와지르>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아무 의심없이 차를 타고서 아침 8시 30분에 모얄레를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하루종일 와지르를 향하여 오는데 저녁이 되어도 도착이 되지 않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운전기사가 하는 말이 오늘 여기서 자고 아침에일찍 <와지르>로 가면 나이로비행 버스를 탈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라고 하는 곳이 그냥 노상입니다. 다행하게 바닥에 까는 것과 담요를 한 장 줍니다. 길에다 깔개를 깔고 담요를 덮고서 병을 보면서 잠을 청했습니다. 이 정도 고생은 누구나(현지인들도) 하는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28일>
<와지르>에 도착하니 나이로비행 버스는 새벽에 떠났고, <가리사>행만 남아있어서 그 버스를 타고 <가리사>에 오후 2시에 도착했습니다. 나이로비행의 모든 차량은 오후 1시가 마지막이고 혹시 모르니 검문소에서 기다리면 정부차량을 얻어탈 수 있다는 말에 검문소에서 5시까지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숙소를 찾던중에 최근에 생긴 호텔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돈으로 12,000원 정도하는 호텔인데 얼마나 시설이 좋은지... 편하게 쉬고서 이튿날 나쿠루로 돌아왔습니다.

<소감>
소말리 지역을 여행하면서 회교도들의 어렵게 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알라>라는 헛된 신에 매여서 일생을 어려움 가운데 있다가, 죽어서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는 저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들인데, 왜 그곳에는 복음이 들어가지 못할까? 하는 의문이 계속되었습니다.
제가 얻은 대답은 전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그들이 복음을 듣겠는가? 하는 것이 의문의 답이었습니다.

학교사역은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학교사역을 통해서 주님을 영접한 아이들이 성령충만 받고 사역자로 훈련되어져, 자기 부족을 위해서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 복음이 결실하게 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선교사가 먼저 본을 보여야 하겠지요.

우리 인이가 오랫동안 아픈중에 제가 식구들 모르게 많이 울었습니다. 제가 대신할 수 없는 고통중에 있는 아들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하나님이 회교도들에게 가지시는 아픔이 제가 경험한 아픔과 비할 수는 없겠지요. 어렴풋하게나마 인이를 통해서 겪은 하나님의 아픔을 가지고 회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하려고 합니다.

위험한 지역입니다. 그렇지만 마귀는 결코 우리를 해하지 못하는데 우리가 먼저 겁먹고 알아서 물러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으로 기도해 주세요.

케냐에서 이 원철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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